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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공생이 말하는 IT | 디자인 이야기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과 문제해결과정으로서의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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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사이먼 소개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은 미국의 행정학자, 경제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인물입니다. 그는 사회과학에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을 도입하면서 '제한된 합리성'과 '만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이론과 행동경제학의 발전에 뿌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인간의 의사결정이 합리적이다."라는 가설에서 출발한 주류 고전 경제학에 반대하는 행동경제학의 전제를 이끌어 냈습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인지 능력의 한계를 최초로 주장한 경제학자이며, 그의 이론은 그가 활동했던 당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현대 사회의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행정학 등 여러 분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허버트 사이먼은 앨런 뉴얼(Allen Newell)과 함께 초기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인지과학, 인지심리학의 토대를 제공한 공헌을 인정받아 함께 1975년 튜링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행동경제학이나 의사결정이론 등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허버트 사이먼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의 이름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막연하게 행동경제학과 관련이 있는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허버트 사이먼은 '디자인(Design)'에 대해서도 다양한 생각과 저작을 남겼습니다.

 

 

허버트 사이먼, 인공과학의 이해 (The Sciences of the Artificial)

 

인공 과학의 이해(The Sciences of the Artificial)이라는 책은 허버트 사이먼이 1969에 출간한 책이며, 자연과학과의 비교를 통해 인공과학에 대한 그의 생각과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자연적인 것과의 반대의 의미로 인공적인 것(Artificial)에 대한 논의를 펼칩니다. 그리고 특히 이 책은 디자인 이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디자인(Design)의 중요성과 현대 사회에서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강조합니다. 

 

 

인공 과학의 이해(The Sciences of the Artificial) 발췌

The engineer, and more generally the designer, is concerned with how things ought to be - how they ought to be in order to attain goals, and to function. 

엔지니어, 더 일반적으로 디자이너는 목표를 달성하고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사물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는 '자연 과학'사물이 어떻게 있는지(How things are)에 대한 학문이라면, '인공 과학'사물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How things ought to be)에 대한 학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 바로 이 '인공 과학'입니다. 

 

또한 그는 또한 저서에서 "기존 상황을 바람직한 상황으로 바꾸기 위한 행동 방침을 고안하는 사람은 누구나 디자인을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은 디자이너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제시합니다. 소프트웨어 툴을 이용해 시각화를 하는 사람이 디자이너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사람이 디자이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자인이 "모든 전문 교육의 핵심이며, 전문직을 과학에서 구분하는 원칙적인 표식"이라고 설명합니다.

 

 

디자인은 문제해결과정이다

 

그가 디자인에 대해서 또 언급한 저작물이 있습니다. "Problem Forming, Problem Finding, and Problem Solving in Design"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허버트 사이먼은 디자인을 만족할 만한 대안을 찾는 문제해결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종합(Synthesis), 선택, 대안 찾기 또는 생성하기, 관심의 초점, 드로잉 보드, 목표와 만족, 유연성과 같은 다양한 개념들을 제시하는데,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비단 디자인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데(특히 회사에서 회의를 하고 업무를 처리할 때) 상당히 도움이 되는 개념들입니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리딩하거나 기획을 할 때 제가 실제로 사용했던 방법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개념들을 이해하고 기억하면, 회사에서 일을 할 때나 인생을 살면서 여러 문제를 해결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해결 도중에 방향을 잃은 것 같을 때 이 개념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답을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버트 사이먼이 이야기하는 종합(Synthesis)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인공과학의 이해 책에서 언급했던, 자연 과학과 인공 과학의 차이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허버트 사이먼은 과학은 분석(Analysis)에 관한 것이고, 공학은 종합(Synthesis)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디자인은 종합이며, 분석의 보완입니다.

 

분석은 이미 구상된 대상, 프로세스, 아이디어의 속성과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분석을 통해 디자인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목표와 제약 조건 하에서, 이 디자인이 목표와 제약 조건을 만족시키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목표와 제약 조건이 단 하나의 독특한 디자인만으로 충족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가능한 모든 디자인을 검토하여 어떤 디자인이 최선인지 결정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디자인은 만족스러운 솔루션을 찾는 것입니다. 허버트 사이먼은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복잡한 환경을 완전히 소화할 수 없을 때 대처하는 메커니즘인 '만족'이라는 개념을 디자인 분야에도 적용했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그에 대한 생각

 

허버트 사이먼의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조망은 디자인 분야가 산업적으로, 학문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디자인이 가진 중요성과 잠재성에 비해 현대 사회와 산업 환경은 디자인을 단순한 제작(making) 행위로 평가 절하해오기도 했습니다. 디자인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실제로 허버트 사이먼 이후, 많은 디자인 이론가, 학자, 실무자들이 디자인의 지적인 기반을 다지고, 디자인을 통합적인 교양 학문으로서 성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리처드 뷰캐넌(Richard Buchanan), 키스 도스트(Kees Dorst) 등 저명한 디자인 이론가들은 디자인의 학문적 뿌리를 인문학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특히 스탠퍼드 D스쿨에서 고안한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프로세스는 2000년대 초반 경영학과 융합되어 글로벌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미쳤고, 일반 대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인간 중심의 혁신적인 문제 해결법으로서 디자인과 디자인적 사고방식, 디자인 방법론에 대해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허버트 사이먼의 '기존 상황을 바람직한 상황으로 바꾸기 위한 행동 방침을 고안하는 사람은 누구나 디자인을 한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기획자도 디자이너이고, 개발자도 디자이너입니다. CX 담당자도 디자이너이고, 마케터도 디자이너입니다.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인데, 일도 해야 하고, 육아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는 워킹맘도 생활 속 디자이너입니다. (디자이너라는 표현이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영어로 디자인(Design)은 설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해외에서는 건축, 개발, 상품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설계하다, 설계자라는 의미로 디자인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모든 사람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디자이너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인간 중심적 문제 해결을 하는 인문학자이며,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통합 규범으로서의 디자인을 강조하고 디자인의 학문적 뿌리를 인문학에서 찾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오해와 한계를 깨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이 현재 일상생활에서 혹은 산업 환경에서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을까요? 디자인이 단순 제작 행위, 시각화 작업이 아니라 문제해결과정이라고 한다면, 기획 디자이너, 설계 디자이너, 개발 디자이너, 제작 디자이너, 마케팅 디자이너 등 모든 직무에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다양한 직군들에서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버트 사이먼이 주창한 여러 개념들(종합, 선택, 대안, 목표, 제약, 만족, 유연성 등)과 디자인 씽킹 프로세스(문제정의, 아이디어 발상, 프로토타입, 검증 등)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디자인 자체가 가지는 고유성이 약화된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이 고유의 학문적 영역을 구축하고 더욱 발전되기 위해서는 제작(making) 행위로서의 디자인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디자인과 다른 학문 분야와 구분될 수 있는 디자인만의 독창적 가치가 퇴색될 것입니다. 

 

디자인 내에 디자인 이론, 디자인 리서치, 디자인 프랙틱스(실무)를 구분하고, 각기 다른 가치를 인정하고 포용하면서도 각각을 독립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학문을 확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디자인이 가진 시각화, 조형화와 같은 제작 행위로서의 가치도 충분히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디자인'이라는 명칭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UX(User eXperience)'라는 개념이 디자인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던 선입견을 많이 깨부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UX는 기존에 흔히 받아들여지던 제작 행위로서의 디자인 - 좁은 의미로서의 디자인 - 개념과 거리를 둠으로써 디자인 분야의 외연을 더욱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덧붙여 디자인이라는 유용한 시각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타 분야와 협업, 융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한 분야만 잘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적습니다. 환경과 문제들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지식과 기술들이 힘을 합치고 융합되어 시너지를 발휘해야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과/이과/예체능이라는 낡은 근대적 교육 방식 구분의 틀에서 벗어나 다학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능력과 관점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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